39대 미국 대통령이자, 미국에서 가장 나이 많은 생존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일요일에 100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카터는 땅콩 농사꾼이자 미 해군 중위였다. 그는 1970년 조지아 주지사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는 1924년 10월 1일 조지아 주 플레인스에서 베시 릴리안 카터와 제임스 얼 카터 시니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카터에게는 글로리아 스팬, 루스 스테이플턴 그리고 빌리 카터라는 세 명의 남매가 있었다.
카터는 1941년 플레인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조지아 사우스웨스턴 대학에서 잠시 공학을 공부하다가 조지아 공과대학교의 해군 ROTC 프로그램으로 전학했다. 그는 1943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 학급에서 상위 10%에 해당하는 성적으로 졸업했다.
카터는 1946년 USS 와이오밍에 배속되어 복무했다. 그는 1952년에 중위로 승진하였고, 1953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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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는 1960년대 초에 섬터 카운티 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8년 만에 조지아 주지사가 되었고, 정부 효율성, 생태학 및 남부의 지속적인 인종 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카터는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공화당 대통령 제럴드 포드를 물리치고, 마지막으로 민주당 후보가 남부 주들의 과반수를 차지한 대통령으로 남아있다.
한 번의 대통령 임기 동안, 카터는 8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예산 적자를 줄였으며, 기록적인 인플레이션과 금리에도 불구하고 이를 달성했다. 그는 교육부를 설립하고 사회 보장을 강화했으며, 연방 직업에 기록적인 소수 민족 지원자를 임명하고, 국립 공원을 확장했으며, 석유 소비를 줄이고 원자력 사용을 늘리기 위한 에너지 위기 대책을 제안했다.
또한, 카터는 인권을 옹호하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평화를 이끌어내며, 소련과의 핵 제한 조약을 체결하고,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했다.
대통령 후보이자 대통령으로서 카터는 LGBTQ 커뮤니티를 지지하여, 당시에는 여러 공직자들이 지지하지 않던 시기에 이를 지지했다. 예를 들어, 1978년 카터는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에게 제안 6(브리그스 이니셔티브, Briggs Initiative)를 무산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 제안은 동성애자와 레즈비언이 주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유권자들은 100만 표 이상으로 반대안을 거부했다.
1980년 재선에 출마할 때, 카터는 민주당 플랫폼에 동성애자 권리 조항을 지지한 첫 번째 민주당원이었다.
국내 경제 문제, 극심한 인플레이션,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겹쳐서 카터의 인기에는 타격을 주었고, 그는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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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의 임기 후, 카터는 전 세계의 인권 문제를 옹호하는 데 힘썼다. 카터와 그의 아내 로잘린은 1982년에 카터 센터를 설립하여 인도적 고통을 줄이고 인권 이니셔티브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카터 센터는 전 세계 민주적 선거를 촉진하고 지원했으며, 빈곤 지역의 질병 확산을 줄이고 치료하는 데 노력했다. 카터는 또한 주택 기구인 ‘해비타트 운동(Habitat for Humanity)’을 지원하는 자원 봉사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백악관을 떠난 지 20년 후인 2002년, 카터는 평화, 민주주의, 인권, 사회적 및 경제적 발전을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카터는 30권의 저서를 썼으며, 그 중 2006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인 “팔레스타인: 평화가 아닌 아파르트헤이드”가 있다. 카터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2020년 다큐멘터리 “지미 카터: 록앤롤 대통령”에서 표현되었다.
카터는 그의 자녀인 에이미, 잭, 도넬 및 제임스 카터와 함께 생존해 있다. 그의 아내인 로잘린은 2023년 11월 19일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기여자: 엘리자베스 발보아, 앤서니 노토
사진: 1977년의 지미 카터, 사진 제공: 도서관의 베르나르드 고트프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