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12월 29일) 100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서거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심했던 시기에 제 3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당시 미국은 워터게이트 스캔들, 높은 인플레이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시위, 높은 정부 지출, 느슨한 통화정책 등의 상황이었다.
조지아 출신으로 1976년에 백악관을 차지한 지미 카터는 경기침체와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제를 물려받았으며, 이는 1980년 재선 도전에서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세인트루이스 연은에 따르면 카터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기 전인 1976년 인플레이션은 6%에 육박했다. 그 후에는 6.5%, 7.5%, 11.3%, 13.5%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참고로 경제학자들은 2%를 건전한 인플레이션율로 간주한다.
1978년에 지미 카터는 “지난 10년 동안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에서 우리는 인플레이션이 시작되면 실제로 인플레이션을 지속시키는 태도와 습관을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기업은 비용 상승을 예상하기 때문에 가격을 올린다. 노조는 임금 인상을 예상하기 때문에 대규모 임금 합의를 요구하고, 일단 시작되면 임금과 물가는 서로를 쫓아 올라간다. 마치 축구 경기장에 모인 관중과 같다. 모두가 앉아 있어야 모두가 잘 볼 수 있지만 누구도 먼저 앉으려 하지 않는다.”
1979년에 카터는 당시 뉴욕 연은 총재였던 폴 볼커를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지명했다. 볼커는 연방기금 금리를 10%에서 거의 18%까지 인상하면서 매파적인 통화정책을 펼쳤다. 그 후 실업률이 8%에 가까워지면서 경제는 불황에 접어들었다.
또한 그해에는 이란 혁명도 겪고 있었다. 1979년 4월부터 1980년 11월까지 에너지 정보국 데이터에 따르면 유가는 130% 이상 급등했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악화되고 공급 충격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실업률이 증가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카터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의 도전에 직면했지만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본 선거에서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며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공화당 후보였던 레이건은 44개 주에서 10%에 가까운 득표율로 승리했다.
볼커의 통화정책과 유도된 경기침체는 카터의 선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볼커의 금리인상은 레이건 행정부에서도 계속되었다. 1981년과 1982년에는 금리가 21%까지 올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역사적인 디스인플레이션과 높은 인플레이션 기대감의 종식에 대한 볼커의 공로를 인정한다. 198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인플레이션은 6% 미만으로 유지되었고, 보통 2% 내외를 유지했다.
역사학자들은 카터의 대통령직을 계속 재평가해왔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카터 행정부의 인기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정이 장기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카터가 볼커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한 것은 정치적으로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역사적인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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